2019년 2월 6일 수요일

드라마센터에 관련된 레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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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드라마 센터
1. 1960년대의 연극사적 쟁점.
60년대 연극의 쟁점은 기성연극과는 다른 새로운 연극모색을 위해 등장한 동인제 극단과 그들 활동, 그리고 전후 연극 전용공간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최첨단 극장형태와 설비를 갖춘 드라마센터의 건립으로부터 출발한다. 당시 기성연극이란 이해랑을 중심으로 한 극단 신협과 국립극단, 그와 불가분의 관계 하에 있는 유치진을 중심으로 성립한 드라마 센터를 일컫는다. 살펴보겠지만 '새로운 연극'을 이상향으로 꼽으면서 촉발된 일련의 동인제 극단의 출범은 '기성'을 흔들만한 구체화된 안티테제가 없었고 연극 기술적 측면에서의 능력 또한 부재했다. 1960년대는 50년대 이데올로기를 답습하는 가운데 기성 연극계가 주도하는 연극담론의 장 안에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60년대는 젊은 인력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희곡 양식의 수용과 모색 속에서 공연 전반의 양식적 변동이 서서히 가열되는, 이른바 70년대의 연극적 징후가 싹트는 과도기적 상태에 이기도 했다.
2. 드라마 센터의 건립과 그 의미.
드라마 센터는 정부로부터 불하받은 토지와 유치진의 사재 그리고 록펠러재단의 도움으로 1960년 10월 착공되고 1962년 봄에 완공된다. 1962년 4월 12일 문을 연 드라마 센터는 최신무대와 시설을 갖춘 현대식 극장으로 연극전용무대나 시설이 없던 당시의 연극 활동에 새 활로를 마련해준 민간극장이란 점에서 그 의의가 컸다. 그렇지만 관객부재와 엄청난 재정난을 이기지 못해 일 년 만에 드라마 센터는 문을 닫게 된다.
유치진이 드라마센터를 세운 동기는 무엇보다 연극의 후진성을 극복하여 우리 민족연극을 세계적 수준까지 끌어올리고 싶어서였다. 개관 당시부터 유치진은 드라마 센터가 해야 할 일을 명료히 제시하는데 그 중 첫째가 예술의 탐구이고 다음은 인재의 양성이며 마지막으로는 우리 연극 문화재의 정리보관이었다. 중요한 것은 유치진이 이러한 일들을 드라마 센터 건물과 연계시켜 구체성 있게 제안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드라마 센터 건물 안에 설비된 반원형의 소극장과, 아카데미(연구소), 도서관이 이상의 세 가지 일을 각각 공조하면서 담당할 것" 이라는 것이다. 유치진은 드라마 센터 건립을 단지 연극 상영을 위한 극장공간이라 보지 않았따. 그는 드라마센터를 '후진'에 있는 한국연극을 끌어 올리는 한국 연극 운동의 근거지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전후 침체한 연극계에 무대예술의 '혁명'을 이루려는 꿈을 안고 출발한 드라마 센터는 개관기념으로 세익스피어의 <햄리트>를 유치진 연출로 공연한 후, 불과 여섯 편의 작품을 남긴 채 거의 일 년만인 1963년 1월 문을 닫고 만다. 늘어나는 부채와, 관객부재, 연기진의 대거이탈, 그리고 극장장에 연기 연출을 도맡아 하던 이해랑이 떠남으로써 드라마센터는 문을 닫게 된 것이다. 이렇게 공연활동은 관객부재로 활성화되지 못하였지만 유치진은 인재 양성에 뜻을 두고 한국연극연구소 부설 연극아카데미에 연기과와 극작과를 개설하여 극작가와 연기자를 배출하였으며, 전국 남녀 중 고교 연극경연대회, 한국 연극상 제정, 대학 내 연극부 설치 등의 연극운동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재정난을 해소하기 위해 드라마센터는 영화관 대관극장으로, 예식장이나 미군 공연장 등으로 전락함으로써 드라마센터 애초의 소유권이 시비의 대상이 되는 등 비난과 불신을 받기도 했다.
1964년, 유치진은 드라마센터 부설 연극아카데미 출신들을 주축으로 '극단 드라마센터'를 발족시키고 흥행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장기적 안목으로 공연활동을 전개하고자 한다. 그러나 애초의 연중무휴 연극공연이라는 꿈은 접어야 했고 드라마센터는 자체 공연이 없을 때는 여전히 자매예술 및 각종 회합에 대관 해주는 등의 부진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결국 극단 드라마센터는 1965년 신춘문예 당선작 공연을 필두로 창작극과 신진극작가 발굴에만 전력하게 된다.
3. 드라마센터의 새로운 극장 형태와 개관공연 햄리트.
드라마센터의 준공은 극장사로서 뿐만 아니라 한국 연극사에서도 획기적인 일이었다. 1902년 최초의 관립극장 협률사가 선 이래, 연극전문 극장으로서 설계되어 설립되기로는 1935년 동양극장 이래 드라마센터가 두 번째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드라마센터는 프로시니엄 무대가 보편적인 것으로 인식되던 시대에 원형극장을 응용한 돌출 무대를 갖추었다. 이러한 최신무대와 시설을 갖춘 중형극장은 당시 동양권 내에서 찾아보기 힘들었고, 나아가 서구 연극사적 흐름과도 결코 동떨어져 있지 않은 것이었다. 당시 서구 실험극은 삶과 예술의 간격을 파기하려는 움직임 속에서 무대와 객석간 거리를 좁히는 시도로써 원형무대나 돌출무대를 도입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드라마센터 무대공간은 1960년대 이래 활성화된 서구 실험극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었다.
드라마센터 무대는 메인스테이지 양옆으로 사이드 스테이지가 있고 이것이 계단으로 연결되어 백 스테이지가 객석 뒤에 마련되어 있음으로 해서 관객은 마치 무대의 한 가운데에 놓여 있는 것과 같이 되어 있다. 삼면의 객석으로 둘러싸인 돌출무대라는 것 외에도 드라마센터는 고대 그리스의 야외극장에서부터 사진틀 무대 그리고 가부끼 무대까지, 동서고금의 무대 형태가 총집합 되어 있었다.
또 무대와 객석을 연결하는 '하나미치'와 같은 교량무대가 있었고, 객석을 감싸 안으며 객석 후면에 마련된 '성가대 무대(백 스테이지)'와 객석과 인접한 앞 무대에 배우들이 등퇴장 할 수 있는 트랩, 즉 갱로가 마련되어 있었다. 갱로는 배우들 등퇴장이 무대 후면에서만 이루어지던 기존 연극과 달리 영화에서의 클로즈업과 같은 효과를 주기 위해 고안된 통로였다. 보다 힘찬 박력과 감명을 관중에게 가하는 동시에 배우의 호흡을 관중의 호흡 속에서 돋아 나오도록 하자는 유치진의 의도 때문이었다.

하고 싶은 말
좀 더 업그레이드하여 자료를 보완하여,
과제물을 꼼꼼하게 정성을 들어 작성했습니다.

위 자료 요약정리 잘되어 있으니 잘 참고하시어
학업에 나날이 발전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
구입자 분의 앞날에 항상 무궁한 발전과 행복과 행운이 깃들기를 홧팅

키워드
센터, 드라마, 연극, 드라마센터, 무대, 유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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